본문 바로가기

창조 부산 게시글 상세내용 - 범전동 본동마을 이야기(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첨부파일, 상세 내용으로 구성)
범전동 본동마을 이야기
작 성 자 관리자 등록일 2015-12-02 조   회 2454
첨부파일

시민공원 뿌리내린 '경마장마을', 배고팠던 그 시절 기회의 땅이었다

 

부산진 범전동 본동마을 이야기 - 1956년에 촬영한증언자 박 씨의 가족사진

1956년에 촬영한증언자 박 씨의 가족사진. 임시수도기념관 제공

 

- 논밭 둘러싸인 작은 농촌마을
- 서면경마장 시절 꽤 커졌지만
- 한국전쟁으로 미군 주둔
- 바람 잘 날 없었던 동네 
- 88올림픽 이후 미군 줄면서
- 장사꾼 떠나 슬럼화 가속 
- 먹거리와 일자리 있었던
- 피란민의 든든한 생활터전 
- '양색시'도 꺼리지 않았던 곳
- 시민공원 편입돼 역사 속으로

 

 

■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본동마을부산진 범전동 본동마을 이야기 -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본동마을

범전동은 행정구역과는 별개로 본동마을을 포함하여 총 4개의 마을로 구성된다. 원래 1개의 큰 마을이었으나 1935년 동해남부선이 개통되면서 부전역을 기점으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졌고, 서면경마장이 들어서면서 서쪽 마을이 분리되고 동쪽 공동묘지가 있던 곳에 한국전쟁기에 피란민이 이주해 살면서 또 다른 마을이 생겼는데 흔히들 경마장마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아스럽게도 가장 오래된 중심 부락인 본동마을, 부대 3문(GATE 3) 앞거리 또는 돌출마을 등으로 불리던 이 자연부락은 가장 먼저 시민공원 조성에 따른 부지 편입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지금의 시민공원 부지는 북쪽 금용산(쇄미산)의 아랫자락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한 범전동과 연지동 일대의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농촌마을로 19세기 후반에는 범전리를 기준으로 대략 30여 호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하여 일본인 자본가가 이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1920년대 후반에는 그나마 일본인 지주에게 땅을 붙여먹고 살던 몇몇 소작농들마저 1930년 서면경마장 건립으로 그들 삶의 터전을 떠나야했다.
서면경마장 시절에는 동네가 꽤 커져 마을 호구 수도 늘었고 서면공립보통학교(현 성지초등학교)도 설립되었다. 경마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일부 마을 사람들은 경기장 밖 먼발치에서 어느 말이 이길지 서로 내기를 하기도 했지만, 경마장 마사와 인접한 서면공립보통학교에서는 말똥과 마사 폐기물의 악취로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일본군이 머물던 자리에 낮선 서구의 이방인 미군이 주둔하면서 캠프 하야리아는 본동마을을 통해 미국 상품과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시민들에게 이국 문화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둔 미군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강간·총기사건 등 잦은 범죄 발생으로 인해 바람 잘 날 없는 동네였음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시대의 아픔이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주한미군 감축이 본격화됨에 따라 미군을 상대로 하던 장사의 경기가 침체되었으며 하나 둘씩 장사꾼들이 마을에서 떠나가면서 본동마을의 슬럼화는 가속화 되었다. 2006년 캠프 하야리아가 폐쇄되고 2010년 부지관리권을 국방부에서 부산시로 이양 받으면서 시민공원 부지에 본동마을의 편입 문제가 제기되었다. 공원 전체 계획 도면의 남쪽에 위치한 본동마을이 불쑥 튀어나온 모양을 하고 있었기에 '돌출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본동마을 원주민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명칭이었다. 어쨌든 2011년 기공식을 계기로 부지 매입 작업을 마무리하여 본동마을은 공원에 포함되었고 현재 시민공원의 '남2문'과 '시민마루' 그리고 '남정문'을 잇는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 마을 터줏대감의 증언부산진 범전동 본동마을 이야기 - 범전동 집성촌

범전동에는 밀양 박씨, 무안 박씨, 남평 문씨, 나주 임씨, 전주 이씨 등이 오랫동안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아왔다. 증언자 박규섭 씨에 따르면 특히 범전동 박 씨라 일컫는 자신의 일가는 원래 초량 지역에서 거주하다 당시 연고가 있던 범전동 본동마을에 1890년 전후로 들어와 터전을 잡아 현 공원부지의 1만9800㎡(6000평)정도를 경작하면서 가세를 차차 확장하였다고 한다. 또한 조부는 일제강점기에 뜻있는 유지들과 마을 야학을 설립하였다가 이를 확대하여 서면공립보통학교(현 성지초등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한다. 이러한 영향에서인지 박 씨 집안에는 주로 교육 관련 직종 종사자가 많다. 
박 씨 집안 소유의 땅은 다른 본동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과 미군주둔기 그리고 공원이 조성되면서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본동마을 주민들 일부는 강제 소개되어 타지로 떠나게 되고 주민들 땅도 강제 징발된다. 해방 후 잠시 본 소유주의 땅으로 돌아왔다가 정부수립 후 토지개혁법이 시행됨에 따라 유상분배를 받아 박씨 집안에서는 2200여 평의 토지를 확보한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캠프 하야리아가 설치되면서 다시 징발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100년 만에 하야리아 부지가 시민공원이 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오히려 공원이 조성 되면서 박 씨 집안 본가가 공원에 편입됨에 따라 5대에 이르는 120여 년 간의 삶을 접고 타지로 이사를 갔다. 본가 집터에는 마을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사용하였던 120여년 된 우물이 있었는데 현재 시민공원 남쪽 부지에 그대로 보존이 되어 범전동 본동마을 이야기를 유일하게 전하고 있다.

 

 

■ 피란민들의 생활 터전

미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범전동은 피란민에게는 안전과 더불어 먹거리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 많은부산진 범전동 본동마을 이야기 - 범전동 피란민 터전 피란민들이 범전동으로 모여들었으나 본동마을 일대는 집세가 비싸서 동쪽 산기슭의 공동묘지에 하꼬방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 경마장마을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증언자 박 할머니는 전쟁 피난길에 첫 아이를 자신의 등에 업은 채 굶주림으로 잃었다. 우여곡절 끝에 범전동 피란민 판자촌에 도착하여 운 좋게 하꼬방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처음엔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하야리아 부대를 기웃거리며 땔감·천막·우유가루 등을 부탁하여 얻었다. 그러다 알게 된 한국 군인의 도움으로 한 벌에 100원씩 받고 미군 군복 빨래를 시작하면서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으나 생계는 여전히 막막하여 억척같은 생활력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근처에 새로 생긴 진양고무 공장에 다니면 차비도 안 들이고 돈을 벌어 좋았고, 이북사람들이 집을 짓는 공사판에 가서 자갈과 모래를 나르면 삯을 500원 이상 받아서 좋았다. 또한 한 동이에 1원 받는 물장사 일도 부업으로 수입이 쏠쏠했다. 그러던 와중에 서면에 있는 식당에 물을 대어주다가 식당에 취직하여 일을 하게 되는데 그곳의 여주인이 박 씨를 참하게 여겨 땅도 사주고 부동산 투자 방법도 알려준다. 이후 박 씨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으며 어느 정도 큰살림도 이루었다. 피란민 박 씨에게는 범전동 본동마을이 생활의 터전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 양색시와 공존한 마을

한국전쟁이 끝나고 캠프 하야리아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범전동 본동마을에는 미군과 동거를 하는 한국 여성들이 차차 생겨나기 시작했고 동거를 위한 셋방도 많이 생겼다. 당시 미군과 동거하는 여성들은 일종의 현지처로 여겨져 일반 사회에서는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였기부산진 범전동 본동마을 이야기 - 범전동 본동마을 때문에 그들을 비하시킨 '양갈보' 또는 역설적인 표현인 '양공주'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본동마을에서는 유독 이들을 '양색시'라 불렀다. 다소나마 부드러워진 어휘를 사용한 까닭은 경제적인 이익과 인간적인 정에 끌려 그들과 본동마을에서 공존한다는 인식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선 양색시들은 미군과 동거하면서 집주인과 셋방을 나누어 쓸 뿐 아니라 미군이 주는 생활비 또는 자신의 돈으로 PX물품을 구해서 중간상인 '양키장사'와 거래하기도 하였으며 생활습관 면에서도 미용실·목욕탕·양장점·세탁소를 자주 이용하였기 때문에 마을사람들과 경제적으로 공존하는 위치였다. 또한 이들 양색시 대다수의 꿈은 미군과 국제결혼을 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바람을 공유하는 의미로 '색시'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 양색시들의 삶을 가까이서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러 구술자의 증언에 따르면, 본동마을에서는 미군들과 동거하는 양색시를 그냥 그렇게 사는가보다 생각했지 특별히 꺼리는 감정은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본동마을 양색시 중에는 술집이나 매매춘업소 출신들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미군부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친구의 소개 등으로 자연스럽게 만나 미군과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심지어 세를 주던 주인집 딸이 미군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미군 기지촌을 배경으로 한 양색시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시각에서 재해석이 가능하다.
 

 

■ 배고픈 떠돌이 소년의 기억
한국전쟁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났지만 캠프 하야리아 주변에는 여전히 전쟁고아들과 넝마주이 그리고 양아치들로 득실거렸다. 증언자 조 모씨는 이즈음 가정 형편상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고아원인 경남소년학교(지금의 부산진구청 뒤에 위치)에 맡겨지고 어머니는 지인의 도움으로 하야리아 부대 안 세탁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경남소년학교는 시설이 열악했다. 원생들은 목제로 된 2층 침대에 생활했고 난로도 없는 공간에서 모포 2장으로 겨울을 나야했고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항상 밀려오는 배고픔이었다. 고아원에서는 단체로 열을 지어 성지초등학교로 등교시켰는데 이때 아이들은 혹시라도 먹을 것이 떨어져 있나 싶어 땅만 쳐다보며 걸었다. 과일껍질이나 고구마 조각이라도 눈에 띄면 얼른 품에 넣고 나중에 꺼내어 씹어 먹었다.
배고픔을 견디기 어려울 때는 고아원에서 몰래 빠져나와 하야리아 부대로 달려갔다. 경비를 서고 있는 미군들에게 손짓발짓으로 몇 마디 외치면 운이 좋은 날에는 껌·담배·동전·우유 등을 얻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중 일부는 고아원 형들에게 상납도 했다.
증언자와 고아원 아이들은 한번씩 물건을 훔쳐 용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부전역에서 헌 고무신을 가득 실은 트럭이 재활용을 위해 진양고무까지 정기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하야리아 부대 정문에서 굴다리 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속도를 늦춰야 했다. 그 순간 아이들이 트럭에 올라타 흰 고무신을 부전천으로 집어던지고 나중에 그것을 다시 주워 고물상에 팔았다. 그러나 굴다리 주변에 살고 있는 넝마주의 패거리에게 들키는 날에는 주워온 고무신을 모두 뺏기기도 했다. 
 
 

 

증언자에게 하야리아와 범전동은 어린 시절 배고픔에 사무쳤던 잊히지 않는 장소였다.부산진 범전동 본동마을 이야기 - 유현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그래서 틈날 때마다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노트에 빼곡히 적어 놓았다.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기를 기대하면서.
유현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 공동기획: 부산진구,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출처 :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스토리뱅크 ( URL : http://www.storybusan.com/html/05/0501.php?mode=view&idx=650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