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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에 뿌리내린 강태홍류 가락, 강태홍
  • 부산에 뿌리내린 강태홍류 가락, 강태홍

    동래권번의 동기(童妓)였던 원옥화와 강남월을 제자로 가르치면서 산조가락 만들기에 열중하여 1950년 무렵 자신의 예술 세계의 결정체인 ‘강태홍류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완성하게 되었다.

      태그강태홍 | 동래권번 | 원옥화 | 가야금산조

기본정보

강태홍강태홍2

 

강태홍(姜太弘, 1893~1957)의 호는 효산(曉山). 별칭은 강태평(姜太平)이다. 전라남도 무안군 외읍면 교촌리 664번지(현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 664)에서 4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강용안은 어전 광대로 ‘판소리’를 창극화시킨 장본인이고, 큰아버지 강준한은 해금과 피리에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영향으로 강태홍은 어릴 적부터 전통 예술을 접하며 성장하였다.

 

강태홍은 15세 때 고향에서 황복녀와 결혼했으나 결혼생활은 잠시 뿐이었고 그가 객지로 떠도는 바람에 두 사람은 자식도 없이 이혼했다. 한때 광주 신청(神廳)에서 근무하다가 19세 때인 1911년 대구로 와서 본격적으로 국악인으로 활동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경주 권번에서 최금란·이소향 등의 제자를 배출하고 밀양에서 제자들과 풍류회를 조직하여 영제(嶺制) 풍류를 정리하기도 했다. 그는 가야금 산조뿐 아니라 양금, 해금, 단소 등에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었으며 병창으로 화초타령, 대장부가 등을 즐겼고 무용 또한 뛰어나 심봉사 역, 곱사춤은 탁월했다.

 

1926년부터 가야금 병창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1932년 서울에서 발기한 조선악협회의 요곡부(謠曲部)에 참여했고, 1934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7년부터 명창 박동진(朴東鎭)과 경주권번, 대구의 달성권번과 울산권번에서 활동하며 박차와 박귀희에게 산조와 풍류·병창을 전수하기도 했다.

 

강태홍은 1939년 3월 서울 부민관에서 명창 이동백(李東伯)의 은퇴 공연에 찬조 출연한 후 부산의 동래권번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부산에 정착하기는 했으나 부산에서는 이리저리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그 가운데도 동래권번의 동기(童妓)였던 원옥화와 강남월을 제자로 가르치면서 산조가락 만들기에 열중하여 1950년 무렵 자신의 예술 세계의 결정체인 ‘강태홍류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완성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한국음악무용연구소와 강태홍무용연구소를 열어 승무·입 춤·수건 춤 등을 전수하였으며, 가야금과 소리뿐만 아니라 양금·해금·피리 등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꾸준히 제자를 양성하였다. 부산에서의 제자는 원옥화·강남월을 비롯하여 박차경·김춘지·구연우·신명숙·김온경이 있다. 그는 음악적 재능 못지않게 인물도 뛰어난 편이었고 성품은 강직하고 깔끔해서 평생을 한복만 즐겨 입었으며, 해학적이고 태평스러웠다. 상하 예의가 철저하여 권번에서 가야금 외에 예절을 따로 가르치기도 하였다.

 

1951년 전란 중에 강태홍의 산조가 휘모리장단까지 완성되었으며, 동래온천장에 주소를 둔 구연우·신명숙 두 제자만이 한바탕을 전수받았다. 65세가 되던 1957년 2월 3일에 마지막 거처였던 지금의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3가 6번지 김동민의 자택에서 구음 악보를 정리하던 중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는 그의 제자 신명숙에 의해 화장되어 부산 영도다리 아래 바다에 뿌려졌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강태홍류 가야금산조와 강태홍제 향제 줄풍류가 있다.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국악인 강태홍의 제자 중의 한 명인 신명숙(申明淑)은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년)인 ‘강태홍류 가야금산조' 기능보유자로, 스승이 남긴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 번째는 연주시간이 길다. 보통 다른 가야금산조의 바탕은 연주시간이 30분 정도 걸리는데 강태홍류 전 바탕을 연주하는 데는 55분이 걸릴 정도로 긴 바탕으로 구성돼 있다. 맨 마지막에는 조랑말 발굽 소리가 가야금 선율로 표현되는데 선생님은 자연의 소리를 가야금에 담아내는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장단이다. 12박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숨소리에 따라 자유자재로 오갔다. 엇박자를 많이 썼다. 똑같은 중머리 장을 치다가도 늦추기도 해서 고수가 굉장히 난해한 가락이라며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가락을 선생님이 엮어낸 것이다. 세 번째는 당시만 해도 설움이 많아 계면조를 많이 탔는데, 선생님은 그런 소리가 별로 없다. 우조라든지 강산제라든지 우는 소리도 아니고 호탕한 소리도 아닌 중간소리를 찾아가는 독특한 소리로 산조 한바탕을 하면 듣는 사람들이 모두 선비스러워 하는 고상한 음악이었다.

 

 

 

[2016년 12월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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