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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빛 물고기가 범천에서 내려온 이야기를 간직한 범어사
  • 금빛 물고기가 범천에서 내려온 이야기를 간직한 범어사

    범어사는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호국사찰로 창건한 절이다. 1,700년경 조선후기의 기록을 통해 범어사의 역사와 이름의 유래, 설화 등이 전해지고 있다.

    • 시대 : 통일신라
    • 태그범어사창건사적 | 범어사성보박물관 | 독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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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고단봉 금샘 사진범어사 경내 사진범어사 경내사진2

《세종실록·지리지》에 ″동래현에 범어사라는 절이 있는데, 범천에 살던 황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금정산의 돌샘으로 내려왔으므로 그 절의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 조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불교를 배척한 조선시대의 통치자들이 국가에서 편찬한 관찬 지리지에 범어사의 유래와 관련된 설화를 자세하게 기록한 그 자체가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 창건 경위와 시기는 기록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신라시대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이나 일연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의 <의상전교>를 근거로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대사와 그의 직계 제자들이 창건한 해인사·부석사·화엄사 등 신라시대 화엄 10찰에 포함된 화엄종 사원으로, 678년(문무왕18)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에도 의상의 10대 제자 가운데 진정·상원·양원스님과 함께 사영(四英)으로도 불리던 표훈스님이 머물면서 화엄사상을 널리 전파하였으며, 지역사회를 수호하고 왜구의 침략을 진압하는 비보사찰로도 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1700년(숙종26)에 간행된 󰡔범어사창건사적󰡕이라는 목판에는 신라에 침략한 왜구의 격퇴와 관련된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범어사의 이러한 국가·사회적인 기능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조선시대 문인 이유원이 1871년(고종8)에 완성한 《임하필기》의 <범어사의 역을 덜어주다(梵魚寺除役)>에서는 범어사를 영남의 고찰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범어사는 대일교섭의 최전방인 동래지역에 위치하였으므로, 임진왜란 때 크게 약탈당하고 소실되었다. 관선사가 1602년(선조35) 중건하였으나 다시 화재에 휩쓸려, 묘전스님 등이 1613년(광해군5) 대웅전·용화전·관음전·나한전·일주문 등을 또다시 중창하였다. 그 이후에도 비로전을 비롯하여 팔상전·종루·불이문·보제루·천왕문 등의 중창불사가 지속되었다.

 「선찰대본산범어사안내」에는 1613년 이후에 범어사에 머물렀던 주지․승통․총섭·섭리 등 수백 명의 고승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근대에는 경허스님도 주석하였다. 범어사와 범어사성보박물관에는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현재까지 그 오랜 세월의 역사․문화적 흔적을 알려주는 중요 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이 전하고 있거니와 대표적인 유물로 보물 제434호로 지정된 대웅전, 보물 250호로 지정된 3층 석탑, 보물 제419-3호로 지정된 《삼국유사》 권4~5 등이 현존되어 있다.


 범어사의 건물 가운데는 한 지붕 아래 나란히 포함되어 있는 팔상전․독성전․나한전이 흥미롭다. 특히 독성전은 하나의 통나무를 반원형으로 구부려 무지개 문틀을 짜고, 문틀 위로는 탐스러운 모란을 새겨 꽃밭을 만들었다. 무지개 문틀 양쪽에는 한 뼘 가량 크기의 작은 사람이 새겨져 있다. 왼쪽은 치마에 두발을 모은 여자이며, 오른쪽은 민머리에 바지를 입은 남자다. 남자는 무릎을 굽혀 오른발로 문틀을 버티는 모습이 재미있다.

 1706년(숙종32) 이래 그 자리에 있던 이 전각은 천태문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란 별개의 건물로 분리되어 있다가 1906년 하나의 건물로 단장되었다.

 

[2014년 12월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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